돌아와 거울 앞에 선

허영숙/여신원 0 6,092 2009.10.02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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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학교에 가을이 오고 있다. 교문에서 본관에 이르는 길에 늘어선 나무들과 숲에 노란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암록의 무거움이 사라지고 찬란한 가을 색채가 시작되고 있다. 여신원 강의실이 있는 생활관 쪽으로 가노라면 식당에서 신학생들이 아침을 먹는 소리가 달그락 달그락 들린다. 밖은 숲과 나무들 위로 촉촉한 새벽의 안개가 차고 공기는  묵상처럼 고즈녁 한데 아침을 먹는 소리가 따뜻하다.  멀지 않아 경쟁자적인 입장에 돌입할 그들이지만 적어도 지금은 우정을 나누며 아침을 먹고 있구나 생각한다.  

여신원 식구들은 첫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강의실에서 당번이 준비한 빵이나 떡, 바나나, 사과, 삶은 계란 등을 뜨거운 커피와 함께 아침으로 먹는다. 얼마나 행복한 시간인가  얼마나 축복받은 하루인가 감사하며 아침을 먹는다.

벌써 3학기를 맞고 있다.
여신원에 들어오기 직전 나는 밟히고 으깨어지고 바스라지는듯한 고통 속에 눌려 있었다.  육신적으로도 많이 곤고했지만 처음으로 교회에 대한 공포를 맛보았고 살아오는 동안 절대적인 위로와 안식의 장소라고 여겼던 교회를 무서워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신원에 들어와 신학을 공부하게 되다니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다.
여신원은 목사님들 전도사님들의 사모님, 현재 여전도사님으로 사역하시는 분, 그리고  권사님, 집사님 등 오랜 동안 교회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다양한 구성원들이 공부하고 있다. 일 년 남짓한 시간 동안 여신원을 통해 받은 축복을 다 말할 수 없다.

도심 속에 있지만 울창한 숲에 싸여 학교는 수도원처럼 우리의 심신을 거룩한 구별과 고요의 중심에 놓는다. 건물 안에서 혹은 교정에서 마주칠 때마다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안녕하세요? 소리내어 인사를 건네며  고개 숙이는 것, 특히 교수님이 교실에 들어오실 때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존경을 표하는 것은 나의 대학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이것들은 점원이 없는 매점, 무감독 시험등과 함께 합신의 전통인 듯하다.)

첫 학기 <여성 사역> 시간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가족사 가정사 들을 발표해야 했다.  정말 감추고 싶고 숨기고 싶었던 과거들, 상처와 상실, 또 실패와 실수들을 너무도 적나라하고 솔직하게 내어놓았다. 한 학기 내내 우리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내가 잊었던 혹은 사무치게 잊을 수 없었던 내 삶의 여정을 되돌아보고 그 안에서 두리번거리는 어린 나 자신과 만나고 가엾어 하며 껴안는 경험을 하였다. 나의 불행 따윈 정말 가소로울 정도로 동료의 깊은 아픔을 알게 되어 놀라고 울며 서로 붙잡고 위로하고 이해하는 경험을 하였다. 여신원 학우들과 공통적으로 외치는 말이 있다. " 그동안 나는 너무도 몰랐다. 하나님과 나 자신을 너무도 몰랐다!" 수십 년간 신앙생활을 했는데 말이다.  

마른 뼈다귀처럼  내 안에 널려 있던 말씀들, 더하여 잡다한 풍설과 지식의 끈끈한 오물로 엉겨있는 말씀들이 메스를 가하여 수술하듯, 신약과 구약의 교수님들로부터 다양한 방향에서 깊이 배우면서 정리되고 세워지고, 생기가 불어넣어져 살아나는 경험을 하였다.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의 계시 앞에서 수많은 신학자들이 묵상하고 궁구하고 점검한 그 깊은 진리의 내용들을 하나씩 하나씩 이 먼 후대의 사람이 배운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얼마나 엄청난 행운인 것일까?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 아픈 사랑,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성실함 을 배울 때 눈물 났다.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확실히 깨닫게 되고 그 백성인 나를 알게 되었을 때 그 장엄한 나라의 열려진 성문 앞에  서는 전율스러운 감동, 처음으로 알게 된 <디카이오수네>의 단어가 주는 매혹 등 등..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던 대학시절에는 상상할 수 없는 진지함으로 그 배움들을 받아들인다.  

우리의 저렴하고(?)하고 저급한 질문들까지 마치 위대한 질문이기라도 한 듯, 같이 그 질문속에 뛰어들어 열정적으로 답을 찾아주시는 너무도 겸손한 교수님, 장중한 태도로 인격적으로 대하여 주시는 교수님, 간혹 말투가 거칠기는 하지만 소탈하고 인간적인 교수님, 한 사람 한사람의 생활의 어려운 처지를 헤아려주시고 고민하여 주시는 교수님, 오랜 동안 세상과 사람에 찌든 나에게는 교수님들의 학문의 깊이에도 놀라지만 그 태도에 교훈을 받는다.

밤늦도록 보고서를 쓰는 고통, 그것을 뚫고 나갈 때의 날아오르는 느낌, ,글을 완성하여 글 전체를 읽어 볼 때 그 흐뭇한 안착하는 느낌도 행복하다.

본관 강당으로 올라가는 벽에는 1회부터 지난해까지 합신을 졸업한 졸업생들의 사진이 기별로 걸려 있다. 나는 여신원임으로 그 사진 속에 들어가 벽에 걸릴 수 없다. 경건회에 참석하기 하기위해 계단을 오르면서 그 사진들을 본다. 다양한 교단에서 오신 강사 목사님들의 풍성한 말씀이 기다리고 있는 경건회를 가며 찬찬히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내가 알지도 못하는 그들의 꿈이 그립다. 지금은 어느 곳에 그들의 거친 꿈이 깊었는지(조두남의 '선구자'에서) 궁금하다.  

하루의 수업을 마치면 학우들과 함께  지치고 허기졌지만 마치 여고생처럼 재잘거리며 거목이 된 단풍나무 와 은행나무 사이를 걸어 나온다. 곧 가을이 깊어지면 비처럼 잎들이 포도위로 쏟아지고 우리는 단풍의 비를 맞을 것이다..

내가 얼마나 건강해졌는지 . 공부를 통해 쉼을 누리고 위로와 힘을 얻었는지 하나님은 아실 것이다. 내가 무엇이관대 이 <숭고한 공부>를 할 수 있는 선물을 주셨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고마우신 하나님을, 하나님이 있으라 하시는 그 자리에서, 되라 하시는 그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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